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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치유 집회 어떻게 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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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치유 집회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오랜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정상적인 기독교회는 (1)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가운데 필요한 사람들에게 병으로부터의 치유를 때로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즉, 의사들과 의약품의 사용을 통해서), 그리고 때로는 기적적인 방식으로 일으켜주신다는 것을 인정해 왔으나, 동시에 (2) 주께서 항상 병을 치유해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 왔다. 즉, 항상 주께서 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신다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일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해 왔다. 이것이 가장 건전하고 바른 태도이고, 바른 그리스도인들의 성경적 결론이라고 힐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 벗어나는 것은 모두가 기독교와 치유(治癒)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다.

치유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에 언급하려고 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잘못이 있고, 그와 연관된 오해들이 우리 주변에 난무(亂舞)한다. 첫째는, 병으로부터의 치료는 의료 기관이 하는 일이지 교회가 관여할 것이 전혀 아니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치료해 주시는 일은 전혀 없다는 오해(誤解)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그 후의 과정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이신론(理神論)적인 입장이나 극단적인 자유주의적 입장에 선 사람들이 이런 오해를 하게 된다. 이는 이 세상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불신(不信) 풍조를 따라 가는 것이고, 따라서 이런 입장은 궁극적으로 기독교를 없애거나 기독교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또 하나의 극단적인 오해는 그와는 정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기도하면 항상 모든 병을 다 치유해주신다는 오해이다. 이는 ‘주께서 필요하면 병을 고쳐주시고, 대개는 기도의 응답으로 고쳐 주신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오해하여 나타나게 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들이 처해 있는 비참한 현실을 바라볼 때, 특히 수많은 병으로 사람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바라 볼 때 우리들은 안타깝고 그 가련함을 직시하면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일어나 주께서 이렇게 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을 속히 고쳐 주시기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시다(출 15:26 참조). 그러나 그 말은 하나님께서 모든 병을 지금 당장 다 고쳐주시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사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신 예도 많이 있지만, 치료해 주지 않으신 예도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 바울의 경우이다.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의 질병을 고쳐주셨으나 그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 또는 ‘사단의 사자’라고 언급한 (아마도 어떤) 질병이 그에게 있어서, 그것이 그에게서 떠나도록 사도 자신이 세 번씩이나 간구하였으나 주께서는 고쳐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니라”는 말씀만을 주셨다(고후 12:7-9 참조). 또한 그는 기도하여 여러 사람의 병을 고치도록 하셨으나, 디모데에게는 기도하여 병을 고치지 않고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명하기도 했던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디모데전서 5:23). 이와 같이 신실한 성도들의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이 병에 전혀 걸리지 않게 하시거나, 또 병에 걸렸을 때에라도 기도하면 항상 그 병이 치유되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이미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 참 신자들도 이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같은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하고, 같은 병에 걸리기도 하고, 특히 유행병이 돌 때에는 조심하지 않으면 많은 신자들이 그로 인해 죽게 되기도 하는 것임을 아주 분명히 해야 한다. 평소에 그렇게 바르게 가르치지 않으면 그와 같은 일이 있으리라고 성경이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바르게 가르치지 않은 결과로 많은 성도들이 왜 이런 일이 있는가 하고 시험에 빠지게 되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신자들이라도 병에 걸릴 수 있으며, 때로는 그 병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가르쳐야 한다. 물론 때때로 주께 잘못했을 때 주께서 징계로 병을 허락하시는 경우도 있고, 죽게 하신 경우도 있으나, 모든 병든 것이 믿음이 연약한 증거이거나 꼭 잘못한 어떤 특정한 죄 때문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병이 병마(病魔)로 인하여 우리에게 온 것과 같은 용어를 사용해서도 안 된다. 사람이 병에 걸리게 되는 것은 다양한 이유, 복잡한 이유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병과 죽음도 있을 정도이다(요 11:4 참조). 그만큼 모든 것은 그 원인이 복잡한 것이다. 그러므로, 병에 걸리는 등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삶 전체를 잘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고 성도들이 병상(病床)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지만, 항상 단순하게 어떤 잘못 때문에 이 병에 걸렸다고 기계적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또한 성경은 신자들에게 병이 발생했을 때 오직 기도의 방법으로만 치유를 해야 한다고 하지 않는다.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약 5:14)는 말씀에 대한 가장 일반적 이해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1) 의약품을 사용하면서, (2)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름은 1세기 사회에서 일종의 의약품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눅 10:33, 34 참조). 이런 해석이 “기름을 바르며”라는 것을 일종의 “치유를 위한 제의(ritual)”로 보는 해석보다 더 나은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병에 걸렸을 때도, 평상시에 늘 그리했던 것과 같이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의존해서 살아가야 한다. 주님을 의존해서 자신의 삶도 돌아보고, 의사 선생님도 찾아보고 그 조치를 따르면서 의사와 의약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1) 하나님을 의존해서 혹시 하나님께서 의사와 의약품을 사용해서 주께서 병을 고쳐 주시면 감사하여 더 열심히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더 헌신하는 데에로 나아가고, 혹시 (2) 이 세상의 의술이 고칠 희망이 없고 주께서 기적적인 방식으로 고쳐주시기를 원하시면 주께서 해주시는 처분대로 그런 기적적 방식으로 치유를 경험하고 또한 감사해서 자신을 더 주께 드리고, 혹시 (3) 주께서 그 병을 가지고 오래 있으라 하시면 그 때에도 주님을 의존해서 그 병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체득하고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위로하며, 또한 혹시 (4) 주께서 빨리 오라고 하시면 참으로 기쁜 마음으로 주께서 가서 주님과 함께 하늘 복락을 누리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부활한 몸을 입을 것을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네 가지 정황이 모두 다 감사한 것이고, 그 모든 정황 가운데서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지, 어떤 것은 주님을 덜 의존하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을 항상 의존하면서 성경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고난당할 때에 기도할 것이고, 그 고난의 한 부분으로 자신에게 병이 있을 때에 자신과 교회와 함께 기도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성도들은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하라”(약 5:16)는 명령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더 강조하지만, 그 때마다 주께서 모두 다 낳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다. 물론 주님의 뜻에 따라 병으로부터 낳게 해 주시기도 하시고, 히스기야처럼 15년 더 살게도 하시고(왕하 20:6), 그보다 더 오래 살도록 하시기도 하시고, 혹 죽었던 사람들이라도 필요하면 다시 살려 주시기도 하셨다(왕상 17:17-24; 왕하 4:32-37; 막 5:21-43//눅 8:43-56; 눅 7:11-17; 요 11:1-44; 행 9:40).

특히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역하실 때에 참으로, 예수님께서 친히 그렇게 말하라고 하신 바와 같이,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마 11:5). 그는 참으로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마 4:23). 또한 그의 제자들도 동일한 일을 행하도록 하여 주셨다(마 10:1-8).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이 건강하게 되어 사람들 앞에 서게 되었다(행 4:10; 8:7 참조). 참으로 예수님과 사도들의 사역을 통하여 병 나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 주변의 모든 병든 사람들을 모두 다 고쳐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생각해야만 한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시기에 이렇게 치유를 비롯한 이려 기적들이 집중된 이유는 한편으로는 예수님과 사도들을 통해 주신 계시를 확증하는 신임장과 같은 것이기도 하고, 특히 그들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다 실현되었을 때의 정황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 주는 극치에 이른 천국의 맛보기와 같은 것이었음을 유념해야 한다. 이로써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이른 상태는 더 이상 병든 것이나 죽은 것과 같은 것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아주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부활 이후에는 더 이상 주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병드는 것도 있지 아니하다. 그것을 잘 보여 주기 위해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면서 이런 이적들을 보여 주신 예수님의 의도를 우리는 잘 파악해야 한다. 사도들에게 상당한 사도적 이적(apostolic miracles)을 주셨을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런 치유와 같은 이적 자체에 집착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시대가 지난 후에 우리들이 속해 있는 교회 시대에도 주께서 원하시면 병을 낳게 해주시고, 교회는 기도의 응답으로 이루어진 그런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바른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치유 자체에 집착하거나 그런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집회를 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건전한 교회는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집회를 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들은 ‘치유 집회’라는 말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 필요하시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수행해 가는 일에 지장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의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병을 고쳐주시는 일이 많지만, 우리는 병 낳는 것을 목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집회를 하거나 그런 집회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공적으로 정한 예배 시간이나 기도회 시간에 함께 모여 주께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주께서 필요하시면 우리들 가운데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일이 많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중심으로 집회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참으로 그렇게 해야만 한다!!!!), 기도하는 것도 공동체 전체가 하여 어떤 개인의 능력으로 병이 고쳐지는 듯한 오해를 할 만한 상황을 연출하지 말아야 한다. 기도자가 환자의 특정 부위에 손을 얻고 기도한다든지 하여 하나님은 돌아보심으로 치유가 주어지는 경우에 이와 같은 식으로 기도한 경우에는 항상 오해가 발생하게 된다. 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오해하기 쉽고, 특히 그와 같이 기도한 사람 스스로가 오해하기 쉽다. 사도 시대에 사도들이 기도할 때에 성령을 받게 되는 일을 보고서 그 런 권능이 자신에게도 있게 해달고 하던 시몬에게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목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될 것도 없다”고 하면서 매우 강력하게 야단치던 베드로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행 8:15-25). 오늘날도 그런 권능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들도 사도 시대의 다메섹 도상에서 눈을 못 보게 된 사울에게 안수하여 그를 다시 보게 한 아나니아(행 9:12, 17-19) 같이 하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문제는 아나니아에게는 그렇게 하라고 주께서 지시하셨는데, 교회에게는 그렇게 하라고 주께서 하지 많으셨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사도들이 안수하여 병을 고쳤다고 해서 우리가 그런 예를 따라야 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진실한 목사님 가운데서도 주께서 과거에 그 공동체 안에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하여 스스로 오해하는 경우들을 많이 보아 왔다. 엄밀하게 여쭈면 다 주께서 병을 고쳐 주셨고 자신들은 한 일이 없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자신이 이 일에 도구로 사용된 것에 대하여 이런 저런 방식으로 자부심과 확신을 드러내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그런 것은 궁극적으로 교회 전체의 모습에 대한 오해를 낳게 하는 결과를 내게 하는 것이다. 치유나 치유 사역을 위주로 하지 않지만 은근히 그런 일이 특정한 사람을 통하여 일어나야만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참으로 무서운 분위기이다. 이것도 무엇인가 일어나야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정하려는, 궁극적으로 “보는 것으로 행하려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항상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점에서 오해가 많이 있다. 그리하여 이렇게 은근히는 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이 믿음으로 행하는 것인 것처럼 하는 분위기와 언어활동이 유행한다. 은근히 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이 믿음으로 행하는 것과 같이 여겨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이점이 수정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정황에서든지 우리들은 그저 모든 성도들의 영혼과 몸의 건전한 상황에로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뿐이고, 주께서 필요하시면 기도에 응답하여 병을 고쳐 주시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오직 주님께서 필요하다고 여기시면 주께서 친히 병을 고쳐 주시는 것이다. 어떤 정황에서도 특정한 사람이 능력이 있는 듯이 오해할만한 이런 일이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저 교회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는 중에 주께서 병을 고쳐주시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만을 높이게 된다. 우리는 사도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시도와 종교적 천재의 차이는 그야 말로 질적인 차이의 하나이다. 주께서 그렇게 해 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인 것이다. 우리는 그저 간절히 기할 뿐이다. 마음에 불쌍히 여기는 것이 가득하여 참으로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심정이 우리에게도 전달되어 그 뜨거움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주께서 그런 우리와 우리의 기도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란다. 부디 우리 주변이 모두 이런 건강한 교회들과 건전한 그리스도인으로 가득 차게 되기를 위해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참된 그리그도인과 교회로 지켜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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